borrowed body · 빌린 신체
나의 신체는 해체되고 대체된다. 신체로 해왔던 것들은 수많은 도구로 대체된다. 이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대체된 도구는 나의 뻗어진 신체이다. 외부는 나의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도구가 된다. 뻗어진 신체이다.
나는 타인의 신체를 빌린다. 나의 신체를 타인에게 빌려준다. 빌리고 빌려진다. 댓가를 받고 댓가를 지불한다. 서로 연결되고 얽히며, 나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신체를 빌려 살아간다. 누군가는 전혀 모를 나의 신체를 빌려 살아간다. 나는 타인의 xxx이고 타인은 나의 xxx이다.
물성은 점차 사라지고 그것은 데이터가 된다. 대부분 만질 수 없는 정보가 된다. 그렇기에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하지 않는다. 단지 소비만 한다. 필요할 때, 그 순간에만 빌려 사용한다. 그 뿐이다. 날마다 기가바이트 단위의 데이터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랩톱에 저장되지 않는다. 갖지도 버리지도 않는다.
소리는 신체가 없다. 그것은 종종 이동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진동이고 떨림이다. 그 자체는 무에 가깝지만, 자신의 자리에 머물지 않으며, 온세상에 늘어선 물질들을 매개로 사용한다. 신체를 빌려, 서로가 서로를 빌려 진동을 전달한다. 나는 당신의 진동이고, 당신은 나의 진동이다. 그렇게 서로 매개로서 만난다. 그렇기에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하지만 그렇기에 소리는 폭력적이다. 귀가 있는 자에게만 허락하는 소리의 존재는 그들에게 듣기를 강제한다. 닫을 수 없는 귀는 나에게로의 침투를 거부할 수 없다. 소리는 나의 신체를 빌리지만, 난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소리에게 만큼은 신체를 내어줄 수 밖에 없다. 소리 앞에 우리는 빌려줘야만 한다. 채무밖에 못하는 채권자이다. 이러한 강제성은 어쩌면 우리에게 위험에서 피하고 타인의 말을 듣고 소통하며 살라는 소리의 명령이다.
더불어 한-방향으로 뻗어나가는 파형으로서의 소리의 성격은 그러한 성격을 가진 빛, 전기, 미디어, 인터넷 등과 유사성으로 서로간의 상호적 작업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예를 들면 파형으로서의 소리는 +와 -로 또는 0과 1로 해석이 가능하기에, 전기장이 그 가교 역할을 하여, 디지털 세계와의 호환이 가능하다. 즉 전기장을 모스부호처럼 활용하여 소리를 내보내고, 받아낸다. 그러므로 확장되는 작업의 공간은 소유할 수 있는 악보의 공간을 넘어서고, 전통적 작곡가로서의 정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창작자로서 하나의 매개이다. 세계와 사회 사이의 매개이다. 개인성의 개인화를 넘어 탈개인성의 탈개인화를 시도한다. 마치 소리처럼 말이다. 나의 몸부림과 나의 떨림은 외부의 몸부림과 외부의 떨림으로부터이다. 주인은 없다. 주인이라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의 종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란 게 의미가 있을까 싶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절대적 개인은 없다.
탈시공간화, 동시공간성의 시대에서의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개인, 새로운 보편적 예술음악과 더불어 동시대의 테크놀로지의 급진적 발전으로, 한 개인은 탈시공간화된 세계를 영유하고, 이 사회와 동-시공간성을 향유한다. 이렇게 동기화된 개인은 또 다른 의미로 절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개인’은 다시 그에 합당한 ‘새로운 보편적 예술음악’을 사유하여야만 한다. 새로운 개인은 여러 의미에서 보편적 개인이어야 한다. 서로 동기화되고 빌려지며 확장되기 위하여.
어디까지 나의 손이 닿을 수 있을까. 무엇까지 나의 손이 될 것인가 궁금하다. 어쩌면 소리가 폭력적이고 강제적이기에 하나의 매개일 수 있다. 그러한 소리처럼, 우리 역시 하나의 매개로서, 서로가 서로의 (시공간에서 자유한) 빌린 신체가 되어, 우리는 이 시대를 조망하고 예술가로서 작업하고자 한다.
- 임찬희